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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시선/독일에서 건축하기

[건축]#13.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by 도이치아재 2019. 10. 23.

많은 건축 대학들이 실습을 해야하는 학기를 필수로 두고 있어서, 매년 9월이 되면 회사에 인턴들이 몰려온다. 이 인턴들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간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건축가가 하는 일들을 곁에서 경험한다. 인턴으로 오는 친구들의 대부분은 학사 5, 6학기째에 오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다. 여기는 학사가 3년제이니, 실습을 하고나서 취업을 하든, 대학원을 가든 선택하는 것 같다.

내가 9월에 휴가 가기 전에도 역시 많은 인턴들이 몰려왔고, 이 중 한명은 불쌍하게도 우리 팀장 밑에서 일을 한다. 휴가가기 전까지 내가 어느정도 방향을 잡아놓은 공모전을 이 인턴 친구를 포함한 인턴 두명과 팀장이 함께 해나갔다고 들었다. 돌아와서 확인한 결과물은 (예상대로) 공모의도를 정확히 빗겨나갔고, 팀장은 모든 회의 내용을 무시하고 다른 방향으로 결론을 지어놨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인턴들에게 듣기로는 팀장은 입으로만 일하고, 모든 도면은 인턴들이 그렸다고 한다. 회사 이름을 달고 나가는 도면을 인턴이 모두 그리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이 공모전에 참여한 인턴들은 모두 주말에 출근을 했다고...!!!? 아니, 세상에... 인턴이 주말에 출근해서 해야만 하는 일은 없다. 그건 정규직으로 채용된 직원들이 아주 바쁠 때나 할일이지 인턴들이 할일이 아니다. 세상에... 이런 개판이... 이 공모전을 마치고, 같이 작업했던 다른 인턴은 또 다른 회사로 옮겼다. ㅜㅜ

추가로, 한 일주일 후 개판이 될 상황이 그려지고 있는 요즘이다. 문제는 늘 그래왔듯 팀장의 일정 조율능력 부족때문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3주 밖에 안남은 공모전을 하겠다고 들고왔다.

"이 공모전 3주 밖에 안남았지만, 정말 흥미로울 것 같아"
"3주는 너무 짧은데...?"
"그래도 이번엔 인턴도 있으니까 더 편할꺼야"
"너도 알겠지만... 3주는..."

딱잘라서 이야기한다. 하겠다고 이미 사장님과 이야기를 다 해놓았으니, 해야한단다. 이런 이유로 이 팀장과 일을 하고 싶어하는 직원이 없다. ㅜㅜ 그럼 난 도대체 왜.... ㅜㅜ

역시나 2주간 그녀는 중요한 결정을 늦춰오고 있다. 결정된 건 딱 한가지, 아주 아주 개략적인 컨셉뿐이다. 이 마저도 내가 낸 대안들 중 하나를 자기가 한 것마냥 사장에게 가서 쪼르르 이야기했다. 아주 밉상이다. 오늘을 기준으로 제출까지 딱 1주일 남았고, 아직 정해진 건 없다.

책상을 가득 채운 일거리들

엎친데 덮친격으로 난 이 공모 프로젝트에서 잠시 빠져야만 했다. 두 달전에 마무리 지었던 단지 계획 설계를 한번 더 발표할 자리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이 단지 계획은 사장님과 나, 이렇게 둘만 했던 프로젝트라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게 아니었다. 공모전 상황은 급하지만, 이 프로젝트가 좀 더 중요하다. 우리 회사가 이 프로젝트를 딸 수 만있다면, 앞으로 2-3년짜리 먹거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때문에, 한국으로 치면 3학년 짜리 학생이 프로들만 참여하는 설계공모의 도면을 그리는 웃지못할 상황이 또 발생했다. 공모전 팀에 인턴 한명과 팀장 한명이 남았으면, 당연히 설계는 팀장이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인턴이 설계를 끌고 나가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퀄리티가 낮을 수 밖에 없다. 3학년 짜리 학생이 뭘 알겠는가... 마감이 코앞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정말 이 공모전에서 당선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건지... 없다면 도대체 무얼 위해 이 공모전에 참여를 했는지...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 순진한 인턴이 자책을 하길래, 위로의 한마디 날렸다.

"다른 어느 설계사무소에서도 인턴에게 모든 도면을 그리라고 하지 않아. 3주라는 기간안에 공모전을 하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상황이야. 3주라는 시간은 건축가 2명 + 인턴 1명이 붙어도 겨우 제출할까말까하는 시간이야.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마. 비정상적인 상황인거니까."

정말 미스터리하다. 어떻게 우리 팀장이 파트너가 됐는지. 아니 능력도 없는데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걸 대단하다고 해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