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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생활기록/슬기로운 독일생활

함께 시작된 억지

by 도이치아재 2025. 11. 11.

일주일에 세번. 해가 뜨기 전, 도시가 아직 조용할 때 집을 나선다. 공기는 차갑고, 발끝엔 아직 잠이 남아 있다. 그 옆에 11살짜리 아들이 선다. 표정만 봐도 안다. 오늘은 달리기보다는 이불 속이 더 좋은 날이다.

아들과 나는 이따금 달리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점점 개인 일정으로 바빠지면서 함께 달릴 수 있는 시간도 자연스레 줄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새벽 달리기였다. 아침이 되기 전의 한 시간, 세상도 조용하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그 시간이라면 비로소 둘이 온전히 함께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순전히 내 생각이었다. 달리기를 통해 ‘노력하면 변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게 말로는 잘 전달되지 않으니까, 같이 뛰면서 몸으로 느끼게 하자고. 그래서 “새벽에 한번 같이 나가볼래?” 하고 물었고, 그날부터 우리의 루틴이 시작됐다. 거절할 법도 한데, 이 녀석도 신기하지. 기꺼이 해보자고 한다.

달리기를 매일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새벽은 더 그렇다. 몸이 덜 깨어 있고, 도시도 아직 잠들어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처음 1km는 늘 힘들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1km가 지나면 공기가 조금 달라지고, 발걸음이 익숙해진다. 아들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투덜거리다가도 1km쯤 지나면 옆에서 숨소리가 일정해진다.

그럴 때면 괜히 말이 나온다. “리듬 좋다. 오늘은 페이스가 딱 맞네.” 가끔은 잔소리처럼 들릴까 싶어 말을 삼키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말했다. “아빠, 오늘은 숨이 덜 찼어.” 그 말이 전부였다. 그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생각해보면, 이건 약간의 억지로 시작됐다. 아들이 딱히 원해서 한 건 아니다. 하지만 함께 뛰는 동안 조금씩 그 억지가 ‘습관’이 되어가고 있고, 이젠 그 습관이 우리 사이의 약속이 되어버렸다.

새벽 달리기의 좋은 점은 단순하다.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땀을 흘리고 마음이 정리된다는 것. 누군가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특별한 목표가 없어도 된다. 그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신발을 신는 일, 그 반복이 하루를 다르게 만든다.

아들은 여전히 새벽마다 귀찮아한다. 나도 그렇다. 날씨가 추워진 요즘은 따듯하게 데워진 침대에서 나가는 게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뛰기 시작하면, 서로 아무 말이 없어도 나란히 뛴다. 리듬이 맞고, 숨소리가 겹친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그 단순한 일에서 우린 뭔가를 배우고 있다.

처음엔 억지였지만, 지금은 함께의 루틴이 되었다. 새벽 공기를 나누고,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그 시간 속에서 조금씩 서로의 속도를 이해해간다.

아마 인생의 많은 일들이 이와 비슷할 것이다. 누군가 옆에서 시작을 도와주면, 언젠가 스스로의 리듬으로 달리게 되는 것. 그걸 믿고 내일도 새벽에 나서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