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설계사무소 중에서 아뜰리에라고 불려지는 사무실이 있다. 한국에서나 독일에서나 아뜰리에 사무실들은 금전적 이득보다는 좀 더 예술적인 측면에서 건축물을 설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은규모의 설계사무실을 일컫는다. 오늘은 슈투트가르트에서 고급 주택과 개인 갤러리만을 설계하는 아뜰리에 면접을 다녀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아뜰리에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서는 꽤나(?) 잘나간다는 건축가였고, 직원은 10명을 두고 있다. 지원은 했지만, 기대는 안했기에 면접을 보자는 연락에 적잖이 놀랐었다. 놀란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 한번 내 포트폴리오에 대한 설명과 내가 왜 당신의 사무실에 지원을 했는지, 왜 독일에 오게됐는지 등 예상질문과 그에 대한 나의 답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일한다면 "내 포트폴리오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할 수 있겠군!" 하며 생각했다. 그만큼 기대했던 곳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날씨는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지만, 난 넥타이에 완벽한 정장차림으로 자전거에 올라탔다. 부자들만을 고객으로 모시는 이 건축가의 사무실은 슈투트가르트 서쪽 저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다. 부자들만 모여산다는 그 곳에 말이다. 그의 아뜰리에로 가는 길은 내내 오르막길이어서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렸다. 맑고 청량한 하늘색 와이셔츠가 진한 파란색으로 완전히 변해버렸다.(겨드랑이부터 서서히...흐흐) 사무실이 이렇게 높은 곳에 있을 줄 알았으면, 그냥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데... 다음엔 구글맵으로 고도도 확인해야겠다...
여길 자전거로 올라오는 사람은 나 밖에 없을꺼다.
땀 범벅이 되어 드디어 아뜰리에 앞에 도착했다. 아직 25분 정도 여유가 있어, 우리 와이프가 챙겨준 손 선풍기를 틀어 땀을 좀 식혔다. 역시... 여자는 현명하다. 어떻게 손 선풍기를 챙겨줄 생각을 했을까?
약속시간 10분 전, 그의 아뜰리에로 들어갔다. 이번엔 초인종 먼저 누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하. 지난 번엔 열리지도 않는 문을 촌스럽게 혼자 열려고 그랬지만 이번엔 아니다. 역시 부자들을 고객으로 모시는 건축가의 아뜰리에는 뭔가 다르긴 달랐다. 입구부터 고급차량 한대가 떡하니 서있었다. 여기서 쫄면 안된다.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담당 직원에게 내 소개를 하고 자리까지 안내 받았다. 자리에 앉으니 물을 한잔 주셨다. 자전거타고 이 오르막을 올라오느라 고생한걸 생각하면 벌컥 벌컥 마시고 싶었지만, 그러면 없어보이니까 조금씩 끊어 마셨다. 허허.
여기가 그 곳이다.
그런데 약속한 오후 3시가 넘어 15분이나 지났음에도 난 기다리기만 했다. 여기서 뭔가 슬슬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비서가 나에게 와서 아직 회의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한다. 뭐 나름 유명하신 분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회의가 길어지는 탓인지, 팀장급 정도의 직원과 면접을 시작하였다. 팀장급 직원과 이런저런 질문과 답을 했다.
"독일엔 왜 왔나요?"
"독일에서 계속 건축을 하실건가요?"
"우리 회사는 이미 알고 계셨나요?"
"우리 회사가 슈투트가르트에서 유명하신건 알고 계시죠?"
"우리 회사는 가구부터 문, 조명, 건물까지 모든 걸 디자인합니다." 등등...
분위기는 다른 사무실과 비슷하게 무겁지 않았다. 난 기다리는 동안 그들의 작품집을 보며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하기도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약간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사무실에서는 실시설계(공사가 가능하도록 도면을 그리는 단계)를 진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신들은 디자인만하고, 나머지는 4-5군데 업체와 협의를 통해 가장 좋은 디테일을 그릴 수 있는 회사와 계약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독일스러운 건축 디테일이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팀장이 하는 말이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 일을 할 때는 <협의>가 가장 중요합니다." 라고 이야기했다. 내 독일어가 완벽하지 않음에 대한 무언의 압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말을 하는 내내 이 사무실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딱 거기까진 좋았다. 대표 건축가의 회의가 끝날 때까지 아마도 이 사람은 나와 시간을 끄는 중이었을것이다. 어쨌든 면접인지 수다인지 모를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이야기 소재가 떨어지자, 그가 회의중인 대표 건축가에게 잠시 다녀왔다. 그리고는 이야기했다.
"아직 2명의 면접자가 더 있으니, 다음주에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저희 생각은 3일 정도 당신이 우리와 함께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잉? 3일을 무료로 일을하라고?) 그 3일동안 당신은 회사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고, 우리는 당신이 어느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을겁니다. 이 시간이 잘 끝나면 6개월 정도 Praktikant(실습생 혹은 인턴)으로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6개월 후 우리는 당신과 '건축가'로서 계약을 할 예정입니다. 우리 회사의 규정이 이렇습니다."
'아...뉘에뉘에... 어련히 그러시겠죠...' 기분이 좋지 않았다. 면접 자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좋은게 좋은거니까. 하지만 이 회사는 내 작품이나 경력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어보였고,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았다.
이 사무실의 첫번째 무례함은 대표건축가가 직접 면접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난 그와 약속을 했는데도 말이다. 아무리 중요한 회의라고해도 잠깐 양해를 구하고, 직접와서 사정을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와 나는 같은 공간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무례함은 한국 건축계 뿐만아니라, 독일 건축계 조차도 이런 쑤뤠기 마인드의 건축가가 버젓이 일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이런 건축가 말이다. 무료 봉사 3일, 그리고 인턴 찌끄레기 6개월 후 계약을 한다는게... 말인지 똥인지 난 잘 모르겠다. 찝찝한 기분으로 회사를 나오자, 핸드폰 이메일 알람이 울렸다. 10일 전 지원한 다른 설계사무소에서 면접을 보자는 이메일이었다.
그래....에잇 퉤! 다음주에 이 회사에서 전화오면 거절해야지. 퉤퉤! 괜히 땀만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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