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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시선/독일에서 건축하기

갑자기 참가하게 된 현상설계(Wettbewerb)

by 도이치아재 2023. 9. 18.

한국에서 일할 때 심심하면 프로젝트가 여러 이유로 멈추거나, 무기한 연기됐던 걸 생각해보면 독일 건축은 한국보다 형편이 훨씬 좋은 것 같다. 독일 건축가들은 정말 복받았다. 요즘 독일 건설경기가 아무리 안좋고, 인플레이션이 심해 중단되는 프로젝트가 많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아직은 회사 경영자가 인맥좋고 손이 넓으면 굳이 힘들게 현상설계를 나가지 않아도 밥벌이 해먹고 살 프로젝트를 어렵지 않게 가져오는 것 같다.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인데, 이번에는 어쩌다 매우 짧게 현상설계 하나를 참여하게 됐다. 프로젝트 하나를 잘 마무리하고, 다음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붕뜬 시간에 현상하나 하자는 것이었다.

실시설계를 하면서 지친 몸과 멘탈을 현상을 통해 재미를 다시 찾자는 취지였다. 애초에 우리 목표는 목표는 1등이 아니었다. 현상설계 결과물도 A0 몇 장이 아닌, A2 크기에 스케치 수준에서 끝나는 과제가 전부였다. 지금 회사는 공모전 팀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냥 각자 진행하는 실시 프로젝트를 하면서 정해진 회의시간에 각자 생각을 말하고 피드백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장점은 굉장히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단점은 작품에 대해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 각자 프로젝트를 하면서 잠깐씩 생각해보는 재미가 나름 쏠쏠했다.

난...?

첫 회의에 참석하고, 바로 2주간 휴가를 떠나게 됐다. 공모전 요강정도만 확인하고 빠진 셈이었다. 2주가 지나 회사로 돌아오니 공모전을 조금 더 열심히 하는 동료와 아예 관심을 끈 동료로 나뉘었다. 나는 이미 2주나 참여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중간에 들어가기도 조금은 애매한 상황이었고, 마감은 주말빼고 5일이 남은 상황. 그래도 회사에서 공모전 경험이 젤 많은 사람이 나인데, 뭐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팀장에게 참여해도 되냐고 물어보니 흔쾌히 "드루와!" 해주셔서 시작하게 됐다.

"우리... 컨셉 정했어? 아이디어가 어떻게 돼?"
"그런거 없어.....ㅜㅜ..."

지난 2주간 그냥 아이디어 회의만 했던 것이었다. 각자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고, 공모전은 시간되는 사람이 짬짬히 진행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그 누구하나 섣부르게 결정하거나 끌고나가지 못하니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아이디어야 어찌되었든 아이디어를 결과물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니 다들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독일에서 현상설계를 할 때 (뭐...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그냥 건물에만 집중해서 설계하진 않는 것 같다. 패널을 어떻게 구성할지, 단면을 어떻게 보여줄지, 컨셉은 어떻게 표현할지 정도를 정리해두고 개략적인 레이아웃이 짜여진 상태에서 설계를 해나가려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종종 다른 사람들과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 전체를 봐야하는데 보통은 너무 평면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는게 내가 느끼고 있는 독일 건축가들의 특징인 것 같다. 처음엔 이런 부분이 답답했는데 이건 이 나라의 설계 특성이니까 옳고 그를게 없지 않을까. 근데 그렇게 전체를 염두해두고 계획해 나가면 설계가 진행될 수록 패널에 들어가야 하는 요소들이 더 명확해지고 업무의 진척도도 한눈에 보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더 효율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퇴근 전에 쓱쓱 대충 파워포인트로 A2 패널 레이아웃을 짜놓고 퇴근을 했는데, 다들 좋게 보았는지 그 다음 날 아침에 그 패널이 출력되어서 회의실에 걸려있었다. 이 레이아웃이 우리가 만들어낸 최초의 결과물인 셈이다. 여기에 다른 팀원들의 아이디어도 추가되고, 각자 맡은 부분을 나눠가짐으로써 처음 내 레이아웃에서 조금 더 발전된 패널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고 나는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재미있게 아이디어 공모전을 하나 마무리 지었고 수상여부를 떠나서 서로 잘했다고 격려해주는 자리를 가졌다.(자화자찬?ㅋㅋ) 공모전을 하면서... 제출했다는데 의의를 갖고 이렇게 샴페인 한잔 한적이 처음이지만, 그래도 우리팀이 뭔가 하나 합심해서 끝냈다는 데 의미를 두는 이 조직이 조금씩 더 마음에 들기 시작하는 것 같다.

최종적으로 공모전 참가인원은 나를 포함해 마지막까지 일을 한 직원들이 이름을 올렸다. 아이디어를 냈지만, 구체화하는 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직원은 빠지게 되었다. 역시 공모전은 마지막까지 한 애들이 임자인 것 같다. 이제 또 열심히 실시설계를 해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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