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하나의 프로젝트를 소개해보려 합니다. 설계는 이미 마무리되었고, 현재는 현장 대응 중이라 프로젝트의 끝이 서서히 보이고 있는 시점입니다. 이번 건물은... 뭐랄까, 미적 감흥도 없고 철학적 메시지도 없으며, 영혼을 불어넣을 틈도 주지 않는, 지극히 기능적인 ‘산업시설’입니다. 그러니 “디자인” 이야기는 과감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개보수 프로젝트에서 건축가의 미션은 단 하나였죠.
“겨울이 오기 전에 오래된 Kessel(보일러)을 바꿔라!”
말 그대로였습니다.
프로젝트 개요
이 건물은 독일 칼스루헤 공대(KIT) Nord 캠퍼스의 난방을 책임지고 있는 보일러 건물입니다. 내부에는 개당 무게만 10톤이 넘는 보일러(Kessel)가 세 개나 자리잡고 있었고, 이 중 두 대가 은퇴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건축가의 주요 과제는 이 낡은 거물들을 무사히 빼내고, 새로 온 거물들을 조심스럽게 집어넣는 작업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엔 단순한 설비 중심 프로젝트이니 건축은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역할 정도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웬걸, 보일러를 어떻게 꺼내고 다시 넣을지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철거는 뭐, 분해해서 나가면 되니 된다 쳐도… 새 보일러는 조립된 채로 와야 하니, 그 크고 무거운 놈을 어떻게 건물 안에 넣을지가 문제였습니다.
플랜 A는 실패
가장 먼저 생각한 방법은, 입면 일부를 뜯어서 보일러를 밀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늘 친절하지 않죠. 그쪽은 사용 중인 사무실과 복잡한 배관들이 얽혀 있어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지붕을 뜯고 크레인을 사용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거대한 보일러 뽑기 인형 뽑기 기계 같은 거죠.
구조는 무너진다, 협업은 치열했다
물론 지붕을 뜯으면 그 구조는 당연히 영향을 받습니다. 자칫하면 지붕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니, 지붕 하중을 다시 계산하고, 엉킨 배관들을 피해서 보일러가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동선을 확보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건축, 구조, 설비(TGA) 세 파트가 주 2회 이상 머리를 맞대고 끝없는 협의를 이어갔습니다.
게다가 이 건물은 오래된 건물이라, 도면도 수기로 그려진 유물 수준. 재료도 불확실하고, 구조는 미스터리. 심지어 당시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분은 제 남편인데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는, 숙연함과 허탈함과 “와... 이거 진짜 쉽지 않겠구나...”라는 현실감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죠. 지붕에 올라가 조금씩 지붕을 뜯어내보기도 하면서 구조를 확인하고, 하나씩 하나씩 퍼즐을 맞춰 나갔습니다.
드디어 공사 시작!
- 기존 보일러 철거 후, 새 보일러가 놓일 자리에 기초와 지지 구조물(Kesseltisch)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 기존 도면과 현장이 너무 달라 기초를 변경 설계해야 하는 바람에 한 차례 진땀을 빼고,
- 지붕에 비계를 설치해 구조 보강을 한 뒤, 지붕 철거!
- 보일러 반입 직전, 비가 와도 안에 물 새지 않도록 임시 목조 지붕도 설치!
이 임시 지붕은 정말 정성스레 만들어졌습니다. 크레인이 부드럽게 들어올려 지붕 위에 딱 얹히는 모습은 뭔가 DIY 대형가구 조립 보는 느낌이랄까요.
대망의 보일러 등장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10톤짜리 새 보일러 두 대가 현장에 도착했고, 크레인에 매달려 마치 거대한 UFO처럼 공중을 가르며 지붕 쪽으로 다가옵니다....라고 말했지만, 저는 그날 현장에 없었습니다. 저는 Architekt였고, 현장은 대부분 저희 저희 회사 Bauleiter가 맡아 진행하기 때문인데요. 저는 이 장면을 현장에서 보내온 사진으로 처음 접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순간적으로 눈이 커지고 말았습니다.
“진짜 저게 들어갔다고...?”
상상 속 이미지와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과 박력에, 사진만으로도 심장이 철렁했죠. 현장에 있었다면, 아마 제 손에 땀이 흥건했을 겁니다. 만약에라도, 정말 만약에라도 이게 떨어지기라도 했다면… (그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다행히도, 두 보일러 모두 정확히 원하는 위치에 무사히 안착했습니다. 저는 생전 처음으로 보일러에게 감사를 느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
이제 다시 지붕을 닫고, 보일러를 기존 난방 배관과 연결하는 작업이 남았습니다. 여전히 건축이 할 일은 많고, 새로운 문제도 계속 튀어나올 것입니다. 그래도 이제 이 프로젝트의 큰 산 하나는 넘었네요. 다음 단계가 진척되면 또 블로그에 정리해보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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